[스크랩] 천주교의 선교방식, 신교의 선교방식.
천주교의 선교방식, 신교의 선교방식.
원정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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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신토"(천황종교) 선교사는 기독교 선교사들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학교마다, 사찰마다, 군부대마다, 온갖 관공서와 사거리마다 신사와 어진영을 관리하느라 얼마나 많은 신관들이 필요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들 중에는 정말 진심으로, 가난하고 야만적인 조선인들을 진리(?)로 교화하고자 온 헌신된 사역자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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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때론 일본 제국 정부의 준 공무원 신분까지 갖고, 신사참배를 가르치고 인도했습니다. 사실상 우리 민족이 받아 본, 최단 시간에 가장 많이 받아본 ‘선교사’와 ‘사역’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쟁관계에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반항하는 한국인 성도들을 총칼로 죽이고, 고문하여 강제 신사참배를 시키기도 했습니다.(일제시대 내내, 천주교는 거의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도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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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복 직후, 대부분의 일본 신사들은 박살이 났으며 신관들은 어진영과 위폐를 받쳐 들고, 쓸쓸히 섬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한 옛 일본 식민지들-만주, 대만, 동남아, 태평양 섬 일대-에서, 종교로서의 신토는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선교의 참담한 실패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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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제가 36년이 아니라, 360년이었다고 생각해 보지요. 그리고 그들의 민족 말살 정책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일본계 이름을 갖고.. 그리고 인구의 10%정도인 순수 일본인들이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고, 혼혈 일본인이 인구의 80%쯤 되며, 조선어는 개마고원 어디쯤의 상투머리 한 원주민 몇 마을에서만 유지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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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라면, 일본 제국의 국가종교인 ‘신토’는 대략 조선에서도 80% 이상이 믿는 국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큰 영적 체험이나 종교생활은 없어도, 자기 가문의 종교가 대대로 신토임은 부정하지 않게 될 것이구요. 일본 피가 많이 섞여 있을수록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심지어 어찌어찌 독립을 쟁취해도, 언어도 일본어고 종교도 그대로라 ‘현인신’ 천황폐하께서 오실 때마다, 전국에 난리가 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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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로마 가톨릭이 선교한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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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바깥에서 천주교가 과반 이상인 지역은 거의 모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곳들입니다.(스페인어 권 중미와 남미 전체, 필리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 인도 서부의 고아,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들..) 군사적인 정복과 말살, 정책적인 혼혈, 언어와 문화 말살, 폭력적인 강제 개종이 있었습니다. 그 후 수백년에 걸친 식민지배가 이뤄졌구요. 그래서 그 지역 사람들은 지금도 이름이 라틴 계통이며, 백인 피가 몇 프로 섞였는지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달라집니다.(메스티조, 몰라토..) 원주민들의 원래 성과 원래 언어는 잊혀진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독립한지 꽤 되었으면서도 교황만 온다 하면 온 나라가 광란에 휩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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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토의 선교사들 중에 개인적으로 조선을 사랑한 이들이 있었듯, 천주교 선교사들 중에 거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선교 정책은 비교적 일관적이었습니다. 군사, 폭력, 문화 말살, 긴 식민지배..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안하려던 게 아니라 못 한 것 뿐입니다. 황사영 백서, 남연군 도굴사건 등에서처럼, 조선에 선교 온 신부들은 종종 무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혹여 우리나라가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정복되었어도 강제로 개신교화 되지는 않았겠지만(도리어 복음 전파는 더 늦어졌을 것입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정복되었다면 아마도 가톨릭 국가가 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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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중동에 군대(십자군)을 보냈다가 패퇴했고, 중남미와 필리핀에서는 성공했습니다. 원하던데로 조직적인 인종 말살과 강제개종을 통해 선교를 해 내었습니다. 프랑스권 동남아시아는 그렇게 되어가던 중이었는데 남미보다 살짝 철저하지 못해서 이른 해방 후 공산화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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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로마 가톨릭이 국교의 지위를 갖고 있는 비 유럽 국가 중 강제 개종의 피와 장기간의 식민 착취가 일어나지 않았던 곳은 너무나 드뭅니다. 이쯤 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성직자는 민중의 적이라고 할만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그 혁명가들은 주로 천주교권(역시 중남미, 남유럽, 동유럽, 인도차이나의 구 프랑스 식민지들) 및 정교회 권(러시아)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해방신학 역시 남미 천주교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주의적인 시도들 역시 실패를 거듭하고, 천주교도 눈에 띄게 쇠락하는 중에, 20세기 들어 그 지역들은 점차 오순절을 비롯한 개신교의 품으로 들어오는 중입니다.(그리고 개신교권은 공산화 된 역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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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는 천주교처럼 무력으로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정치, 경제적인 이유의 전쟁은 있어도(그것은 어느 종교 문명에서나 항시 있었던 일입니다.) 누군가를 개신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유럽 안에서, ‘30년 전쟁’이나 ‘위그노 전쟁’등이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총칼로 개신교인들을 말살하고 천주교로 재 개종시키러 오는 강대국들(오스트리아, 스페인 등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부르봉 왕가 등)에 대한 약소민족들의 방어 전쟁이었습니다. 북유렵의 개신교 왕국들, 그리고 영국과 스위스와 네덜란드 등이 그렇게 탄생하고, 자유와 독립을 유지해 온 것입니다. 개신교인들 역시 부끄럽게도 총칼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선교의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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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인도를 식민 지배 한다고 해서, 그들을 강제로 기독교화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영국이 떠나던 날 까지,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1-2% 내외였습니다. 그리고 인도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 후에 시작되었습니다.(지금은 7%까지도 보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경우도 수만의 선교사들이 들어갔음에도 역시 1%의 성도를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제국주의의 종말 이후, 문화혁명과 박해 이후에 1억의 성도들이 나타났습니다. 총칼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에도 선교의 씨앗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선교에 성공한 나라는 예외 없이 천주교 국가의 식민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국가의 식민지였던 곳들은 해방 후에 본격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개신교 국가의 식민 지배를 받아 본 적도 없는 나라들에서는 더더욱 고속으로 부흥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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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교회가 부흥하고, 또 그 과정에 미국 선교사님들이 소외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미국인들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주었죠. 6.25때 우리를 위해 죽은 36492명의 미군 전사자들 이전에도, 독립운동을 도와주셨던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재, 이화, 숭실, 연희와 세브란스(훗날 합쳐 연세대)에서 키워낸 제자들은, 결국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탄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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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한민국에서 천주교의 선교가 대체로 실패한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일본 신토의 선교가 실패한 이유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자유를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황사영 백서'가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병인양요에서 우리가 이겼기 때문입니다.(상처뿐인 영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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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칼은 언제나 선교의 걸림돌입니다.
남을 죽여 선교한 천주교와 신토,
그리고 내가 죽어가며 선교했던 개신교..
정부의 돈과 정책으로 선교한 천주교와 신토,
그리고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스스로의 헌신으로 선교한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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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중남미나 필리핀, 서인도, 남아프리카에 어느 정도 천주교의 세력이 있다 한들, 그것은 ‘장물’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21세기의 개신교도 그런 방법으로 선교해도 된다는 뜻이 되겠지요. 만일 그렇다면, ‘원자폭탄을 동원한 선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말도 안되지요. 그런데 천주교가 선교의 도구로 사용한 ‘범선, 화승총, 대포’가 당시의 중남미 필리핀 원주민들에게는 원자폭탄같은 대량 살상 무기였습니다. 그러니 만일 개신교가 원자폭탄으로 선교하는 것이 틀리다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천주교의 과거 행적도 동등하게 비판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마치 진보적인 성도들이 교회를 비판하듯, 천주교 내에서 스스로를 비판하는 이들이 타임라인을 가득 채워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천주교의 지난 포교의 열매들의 대부분은, 일종의 ‘장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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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 진리인지는 여기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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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나갑니다.
매년 비자를 걱정하고, 현지인과 현지 정부의 눈치를 보는..
나는 신교의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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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에게 생명과 진리를 전해준 선교사와 종교개혁자들, 선배 목회자들에게 감사하며.. 모두들 자랑스러운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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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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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며, 다시 개혁하자, 더 개혁하자, 우리는 못났다 소리를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신학교 일학년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들어온 소리입니다. 도리어 한국 교회와 선교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면 어용으로, 보수로, 적폐로 몰리는 분위기가 더 심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생일”은 부족한 사람에게도 좋은 말 해주는 날이고, "광복절" 은 일본보다 우리가 잘한 것을 말하는 날입니다. 굳이 일본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광복절에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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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축복 한마디 나누지 못한 우리의 생일, 가톨릭으로 부터의 광복절이 지나갔습니다. 이쯤에서, 천주교가 지난 500년간 어떻게 선교해 왔고, 우리 개신교는 어떻게 해 왔는지를 긍정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여, 외롭게 글을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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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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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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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며, 다시 개혁하자, 더 개혁하자, 우리는 못났다 소리를 하는데 이 기간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신학교 일학년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들어온 소리입니다. 도리어 한국 교회와 선교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면 어용으로, 보수로, 적폐로 몰리는 분위기가 더 심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생일”은 살인강도에게도 좋은 말 해주는 날이다. 종교개혁 500주년, 축복 한마디 나누지 못한 우리의 생일이 지나갔습니다. 이쯤에서, 천주교가 지난 500년간 어떻게 선교해 왔고, 우리 개신교는 어떻게 해 왔는지를 긍정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 하여, 외롭게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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