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인 내적치유

[스크랩] 열등감과 열등의식의 치유

하늘강가 2014. 9. 20. 18:52

 

 

 

 

열등감과 열등의식의 치유



상처는 사람의 삶의 질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때로 정말 처참하게 파괴하기도 한다. 충분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인데도 그 상처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정말 심한 안타까움이 절망처럼 덮쳐오기도 한다. 특히 외적인 조건이 너무 훌륭하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살다가 망가진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가정이나 좋은 직장 그리고 훌륭한 공부까지 했음에도, 그래서 이제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 있음에도, 자기 내면에 일어나는 상한 마음의 영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때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이런 안타까움을 주는 인물들이 우리 주변에도 많지만, 성경에도 많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안타까운 사람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사울’을 꼽을 수 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에 하나였을 뻔한 사람…, 훌륭한 가문에, 훌륭한 인물에, 부드럽고 겸손한 성격(?)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지는 은혜까지 받은 사람! 그런데 그의 인생의 마지막은 비참함 그 자체이다. 벧산 성벽에 머리도 없이 몸뚱이만 벌거벗겨 매어 달린 종말! 물론 예수님도 그렇게 나무에 벌겨 벗겨 매어 달린 채 돌아가셨으나 질이 다르다. 그분은 상함과 죄를 치유하기 위해 죄의 한 복판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그렇게 돌아가셨으나, 사울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잡으려고 광기를 띠고 쫓아다니다가 자신의 필생의 넘어야 할 대적인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그렇게 엎드러진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무엇인가에 쫓기고 쫓기듯이, 무엇인가를 덮고 감추려고 헐떡거리며 허둥대며 살다가 그렇게 엎드러져 죽은 것이다.


‘쫓기는 사람’(driven People)!,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가 쓴 유명한 책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는 제1부에서 동기 부여를 가지고 사람의 유형을 나누면서, “쫓겨다니는 사람”과 “부름 받은 사람”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 그 쫓기는 사람의 예로 사울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그는 그야말로 쫓기며 살아간 인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렇게 쫓기게 만들었는가? 누가 쫓았는가? 누가 그를 압박했는가? 대답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라이벌이라고 여겼던 다윗조차도… 그는 자기 스스로 혼자 쫓기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기 열등감과 그것을 덮기 위해서….


1.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열등감이란 자기 스스로를 비정상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감정이다. 즉 ‘자존감’(self-esteem)’이 부적절하게 낮은 것이다.”
이러한 열등감의 정의에서 우리가 재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열등감이란 바로 가치(Value)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열등감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와 자아에서 이 가치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제대로 가치 매김이 있는 사람은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지나치게 높게 매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나치게 낮게 매기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내면의 상처를 열등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열등감과 교만 혹은 자만은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정반대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열등감이 자기의 낮은 가치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라면, 교만은 그것에 대한 공격적인 반응일 뿐이다.


사울을 볼 때 그가 열등감의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는 그것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9장 1절에 보면 사울은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a man of outstanding)의 아들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외모가 나오기를 ‘준수한 소년이고,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한 사람’으로 나오고 있다. 성경의 표현으로 인물이 잘났다는 것을 표현할 때 ‘머리털이 풍성하다’와 ‘눈이 빼어나다’ 그리고 ‘키가 크다’임을 생각할 때, 그는 정말 잘생기기는 잘 생긴 사람이었을 것이다. 성경이 극찬할 만큼…. 즉 그는 아주 좋은 가문 출신의 아주 잘생긴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평가는 달랐다. 그 뒤에 나오는 21절 말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 중에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한 자의 소생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내면이다. 객관적으로는 아주 훌륭함에도 그 자신은 자기에 대하여 아주 낮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무가치한 존재로, 그리고 부적절한 존재로….

2. 열등감의 원인들

열등감이란 우리 인간에게 있는 아주 뿌리가 깊은 상처 중에 하나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열등감(感)이라는 단어보다 ‘열등의식(意識)’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만큼 우리의 내면을 완전히 그렇게 바꾸어 놓아버린 상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열등감의 원인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생각보다 뿌리가 깊고, 그것이 제 2차 3차 반응을 일으키며 열등의식으로 발전을 했기에 쉽게 한 두 가지로 그 열등감 혹은 열등의식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몇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상처가 그렇듯이 원죄가 우리 인간이 열등감을 갖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모든 사람은 다 열등감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3명 중 한 명은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한 명도 예외 없이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그 표현방식이 공격적이냐 수동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아주 기본적인 교과서 같은 것이다. 너무나 그 내용이 절묘하고 의미가 있어서 그것을 보면 지금의 나와 내 주변 사람의 내면과 본질이 다 보일 정도이다. 물론 그냥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본다면 그것은 동화이다. 동화 중에서도 아주 유치하고 단순한 동화이다. 하지만, 문화의 껍질을 조금 걷어내고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보면 경악할 메시지와 진리가 그 속에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죄의 결과로 눈이 밝아져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보았다는 것’ 그것이다. ‘눈이 밝아져서 벗었다는 사실을 보았다’라는 것은 아주 절묘한 표현이며 예상 밖의 통찰이다.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수록 점점 자신감이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원죄 속에 있는 열등감이라는 상처의 첫 표현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인간은 원래 조물주 하나님에 비해서 열등하게 지어 졌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죄에 빠졌고,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자기 자신을 보게되고 그것이 열등감을 갖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죄 때문에 자기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더 깊이 열등감을 갖게 된다. 자기의 삶 하나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는 그 한계와 무력함 때문에 그리고 자기 감정하나 자기 맘대로 못하는 절망감 속에서….

둘째로, 다음과 같은 가정 환경은 절대적으로 열등감을 갖게 한다.


(1) 결손 가정(고아, 편부모, broken Family, 떨어져 사는 가정) : 결손 가정은 자녀에게 깊은 열등감을 준다. 왜냐하면 어릴 때 자녀에게 가정은 그의 가치를 형성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는 자기 가치를 매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자기 부모와 형제, 가족이 그의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리거나 무너지거나 깨어졌다면, 그것은 근원적인 열등감으로 자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2) 문제가 있는 부모(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모, 인격적 장애가 있는 부모, 부부싸움, 바람 피는 아버지) : 부모는 자녀에게 모델이며 교사이며 절대적인 영향력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그 부모가 문제가 있을 경우 자녀는 심각한 자기 비하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인격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분노하는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자녀를 심하게 학대하고 비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녀는 엄청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 멍청아 넌 이것도 못하니?’라는 말이 평생을 따라다녀서, 그것 때문에 결혼생활까지 파탄에 이르렀던 한 자매의 눈물나는 자기 상처 고백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부모가 두려움의 상처가 있어서 자녀를 과잉보호한 경우에도 자녀에게 심한 열등감이 있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그 아버지가 자기를 찾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사울의 모습(삼상 9:5, 삼상10:2)을 볼 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모가 과잉보호하면 자녀에게는 자기 발전(self development)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자신의 가치가 건강하게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부모가 없이는 무엇을 해도 자신감이 없거나, 혼자서 무엇을 하면 하면서도 확신이 없는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열등감의 전형적인 증세 중에 하나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있는 부모 중에 특히 부모가 바람을 피운 경우, 그것은 자녀에게 엄청난 열등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내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이 계시다. 그분은 영국 분인데 정말 좋은 신앙인이고 사역자이다. 특히 내적치유에 있어서는 아주 깊은 통찰과 마음(heart)이 있는 분이다. 영국 사람이면서도 동남아에서 사역을 많이 해서 ‘보신탕’을 아주 좋아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내가 내적치유를 시작하던 초기에 그분과 함께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열등감’에 대하여 강의를 하면서 ‘자기의 열등감은 자기 아버지의 불성실(unfaithfulness) 때문에 왔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통찰이 아주 오랫동안 내게 남아 있었고, 그리고 내적치유 사역을 하면서 아주 실감나게 여러 번 확인하게 되었다. 내려진 결론이 ‘바람 피우는 아버지를 둔 자녀 중에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치유되었거나 아니면 덮어버리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교만한 척하기 전에는….


(3) 편애와 비교가 심한 가정 : 편애와 비교는 결국 모든 자녀를 열등감 속에 몰아 넣는다. 편애를 받는 쪽이나 아닌 쪽이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받지 못하는 자녀의 열등감은 더욱 크겠지만...

셋째, 모든 종류의 상처는 열등감을 일으킨다.


상처는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가치’(value)를 저하시킨다. 그래서 꿈을 포기하게 만들고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종류의 상처가 있든지 그것의 부작용(side effect)은 ‘열등감’이다. 그것이 거절감이라는 상처이든, 아니면 굶주림, 두려움이든지 간에 그렇다. 물론 ‘분노하는 마음’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근본은 동일하다. 그가 그렇게 겉으로 부적절하게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고 고집한다는 것은 안으로 그만큼 허약하다는 반증인 것이다. 오죽하면 그러겠는가?

넷째로, 우습게도 아주 많은 경우 자기의 외적 조건이 열등감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1차적인 열등감의 원인이 아니라, 열등감 때문에 스스로 열등한 요인을 수집한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외모적인 특성이나 이름, 학력 등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데, 놀라운 것은 객관적으로는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성경공부 그룹에서 키가 아주 큰 사람과 아주 작은 사람이 함께 있었다. 열등감을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나누어보라고 했더니 키가 큰 사람은 키가 너무 커서 열등감이 있었고, 작은 사람은 작아서 열등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해당하는 나는 어정쩡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았을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열등감이라는 상처의 본질이다.

3. 열등감의 증상들

우선, 내면적으로 두려움, 불안, 자기 학대에 시달린다.


작은 실수나 문제에도 심하게 불안해하고 자기 비하와 자책을 한다. 죄책감의 증상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것은 그냥 막연히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열등감이 많은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 포기한 것 같으나 오히려 내적으로는 ‘욕심’을 많이 갖고 있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니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른 내면을 가지고 있게 되고 그것이 그 스스로를 불안과 불만 속에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열등감이 많은 사람 중에는 때때로 열등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데서 오는 완벽주의적 증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 덮고 위장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처절하기조차 하다.


사울이 아말렉의 우양을 살려두고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그의 숨겨진 욕심의 결과이고, 블레셋과의 전쟁시에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제사를 드렸던 것은 두려움과 실패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적인 열등감의 내적인 증상에서 나온 것이다. 어쩌다가 암몬을 쳐서 이긴 적이 있는데, 그는 그 성공의 기쁨보다는 그것을 유지해야한다는 초초함이 가득했다. 바로 열등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무리하면서 삶을 낭비한 것은 바로 그의 열등감의 결과이다. 다윗에 대한 사람들의 칭찬, 그리고 여인들의 노래(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여러 가지 표시들을 보면서 그는 자기 자신이 자꾸 초라해지고 열등하게 느껴지므로 그것을 덮는 방법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쫓겨다니는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쫓았던 그 자신이었다.

둘째로, 열등감의 상처가 있는 사람은 관계에 있어서 장애가 있다.
이들은 지나치게 겸손하고 희생을 자처하여 겉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는 좋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감사가 없고 불만이 언제나 상존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관계가 좋아 보이지만, 관계가 깊이 발전하지 못하고 조그마한 갈등만 시작되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관계가 단절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유 없는 분노를 느끼며,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같은 피해의식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열등감의 사람은 영적으로도 장애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지 못하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 가운데 있게 된다. 그러다가 보니 신앙적인 확신과 기쁨보다는 언제나 죄송함과 불안 가운데 있고, 은혜를 말하지만, 그것이 기쁨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혹시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으로 부르셔도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오히려 큰 부담으로 가지거나 뒤로 후퇴한다. 사울이 처음에 부름 받았을 때 보였던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르심에 순종한 후에도 계속 뒤를 돌아보고 또 주저앉기 때문에 이들은 영적으로 성장이 매우 늦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적으로 성장이 늦은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완전히 뒷걸음질을 해서 마귀에게 그 내면을 내어 줄 수도 있다. 사울이 보였던 증상들처럼….

4. 결론

인간이 열등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 자신을 볼 때, 대답은 ‘아니다’이다. 피조물인 한은, 그리고 이 죄의 상황 속에 사는 한은, 비교와 평가가 날마다 날라 다니는 세상에 사는 한은,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상처의 치유가 그렇듯이 이것을 치유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말씀 속에 있고 하나님께 있다.


우선, 열등감을 겸손으로 바꿀 수 있다. 나 자신의 솔직한 실존을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겸손이 된다. 모세도 열등감이 있는 사람인데(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수없이 말하는 모습 속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라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열등감의 상처가 변하여 겸손과 온유가 되는 순간포착이다.
자신의 열등함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자꾸 덮으려고 무리하는 대신에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치유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령님의 도우심 안에서만 가능하다.


둘째로, 우리의 가치를 우리 자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찾으면서 열등감에서 치유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우리 자신의 직위나 모습, 소유나 행동 등등에서 찾으려고 할 때, 그것은 끝없는 열등감의 연속이 된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가치(value)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고, 위하여 자신까지 내어 주신 주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분이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가치는 그분에게 있으므로 흔들리지 않는 가치이고, 내가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애써야 유지되는 그런 가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어떤 것 때문에 가치를 매기는 사람은 그것이 그만큼 되지 않을 때에는 심한 열등감에 빠지고, 그것이 좀 될 때에는 역겹고 불안한 교만 가운데 빠진다. 하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가치 매김이 된 사람의 마음속에는 교만이나 열등함이 있지 않고 안심과 감사와 감격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최상급으로 지으셨다는 분명한 확신, 남과 비교할 수 없이 나는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자라는 믿음이 있을 때, 열등감은 더 이상 우리의 내적인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가서 5장 2~8절을 읽으면서 엄청난 치유의 체험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라고 하신 것은 나의 숨이 멎게 하고 나의 모든 무너진 가치를 흔들리지 않게 세워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열등감의 치유를 경험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가치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우리를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다.

 

 

출처 : 소명 카페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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