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신학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릴케).
여기서 시도하는 신학 묵상은, 보통으로 일상의 잡다한 일에 허덕이다 보면 주일날이나 돼야 겨우 차분히 읽거나 생각해 볼 겨를이 있을 것이다. 주일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이 통째로 숨 돌리는 날로 삼아, 일상을 위해 일상의 신학에 관한 생각을 좀 해 봄직도 하지 않을까. 일하고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일상이 일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비추어, 신학에 던져진 물음으로 설펴본다면 어떠할까. 물론 극히 단순한 일들이기는 하나 한두 마디 짤막한 말로는 별로 밝혀질 수 없음을, 아니 가장 단순한 것일수록 실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임을 전제 하고 말이다.
여기서 일상의 신학 일반에 대하여 한마디 하여 서두로 삼는다.
첫째로, 일상의 신학이라는 것이 일상을 축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겠다. 이런 신학이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일상을 일상으로 두라는 말이다. 신앙의 드높은 생각이나 영원의 지혜로도 일상을 축일로 바꿔놓을 수 없거니와 또 바꿔놓아서도 안 된다.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여 내야 한다. 그래야만 일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그대로 있게 된다. 즉, 믿음의 터전, 정심의 도량, 인내의 단련, 호언장담과 거짓 이상의 건전한 폭로, 참되이 사랑하고 성실할 수 있는 차분한 기회, 슬기의 마지막 씨앗인 현실성의 입증이 되는 것이다.
둘째로, 담박하고 성실하게 받아들여진 일상은, 바로 일상으로 머무는 이상, 우리가 하느님과 그의 숨은 은혜라고 부르는 저 영원한 불가사의와 무언의 신비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인간이 행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있는 곳이란 곧 자유롭고 책임있는 행위로 실재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곳이다. 아울러 가장 일상적인 사소한 일도 실은 참으로 인간다운 삶에 본질적 요소로서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포착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인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아 얻게 하는 것은 실상 이념이이나 고상한 말이나 자아 반영이 아니라, 이기심에서 나를 풀어주는 행위, 나를 잊게 해주는 남을 위한 염려, 나를 가라앉히고 슬기롭게 해주는 인내 등이다. 누구든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핵심을 위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낸다면, 그는 작은 것들도 가이없는 깊이를 지녔음을, 영원의 전조임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온 하늘을 담고 있는 물방울처럼 그 자체 이상의 무엇이며, 자체 너머를 가리키는 상징 같은 것, 다가오는 무한성을 알리는 전갈에 스스로 휩쓸린 전령 같은 것, 본연의 현실이 이미 다가왔기 때문에 우리 위에 드리워지는 실재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셋째로, 우리는 주일마다 일싱의 사소한 일들, 별것 아닌 하찮은 일들에 부드러운 마음으로 응해야 한다. 일상사가 짜증을 내게 하는 것은 우리가 짜증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무디게 만드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이 일들이 우리 자신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옳게 이해하지도 처리하지도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기는 일상사가 우리를 현실적이게 하고 더러는 고달프고 낙담케 하며 욕심을 버리고 주저앉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마땅한 일이다. 그것은 배우기 어려워도 배워야만 하고, 영원한 삶이라는 참 축제에 우리 힘 아닌 하느님 은혜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상의 일들이 우리를 일그러지게 하거나 냉소와 회의에 차게 해서는 안 되겠다. 왜냐하면 작은 것은 큰 것의 약속이요 시간은 영원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일이 그렇듯이 일상도 그러하다.
(다음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