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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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1. 유대교 ========= 유대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유대교란 국민성, 또는 일개 종교, 아니면 그 둘을 다 말하는 것인가?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유대 사람으로부터 거절당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까? 위의 그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대교 신봉자들에게 관하여 묻게 되는 질문인 것이다. 유대인들을 처음에는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그들의 조상 "에벨(Eber)"이란 말에서 나온 이름이다(창10:21). 노아의 아들 셈이란 이름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Shem 으로부터 "Semitic" 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포함하는 일개 집단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 유대인의 짧은 역사
유대인들에게(물론 아랍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조상중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셈의 자손(창11:10-28)이며 기원전 약 2,000년경에 살았던 한 히브리인이었다. 성서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한 언약이 설명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장차 가나안 땅(창17:8)을 상속받게 될 한 큰 민족(창12:2)의 아버지로 만들 것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의 손자 이스라엘(야곱으로 알려진)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 열두 아들들은 열두 민족을 이루었다. 그 국민들과 함께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또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알리워 졌었다. 애굽에서 종으로 수백년간 생활한 후 그들은 모세에 의하여 자유를 얻게 되었다. 모세는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리고 왔는데 후에 그 곳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다윗이 왕(1000 B.C) 이었을 때까지, 이스라엘은 확고히 이루어진 한 큰 국가였다. 다윗왕은 수도 예루살렘에 아름다운 성전의 중심지를 건설하고자 계획했다.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이 그 성전을 완성함으로써 옛 세계의 기적중의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 솔로몬왕이 죽게 되자(922 B.C) 이스라엘 나라는 큰 내란으로 분열되었다. 그로 인하여 마침내 국가가 둘로 나뉘게 되어 북방은 "이스라엘", 남방은 "유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에는 장기간 국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했던 아주 부패한 왕들이 계속되었다.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휩쓸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분산되었던 것이다. 유대나라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왕들이 더러 있어서 좀 오랫동안 지속되었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대를 정복하여 기원전 586년에 성전은 파괴되고 말았다. 메디아인(메데)들과 페르샤인들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했을 때 그들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의 종교인 유대교는 토라(Torah), 또는 율법에 굳게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순종하는 백성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 율법 후에 선지자들이 왔다. 이들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공의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선지자들은 사소한 법이나 규칙보다는 공의와 사랑을 더 중요시했던 것이다. 미가는 성서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고 했다. 이러한 고상한 행위는 유대인의 사고방식의 근본으로 아직도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자선단체들이 유대인의 후원과 지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원후(서기) 70년 로마인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할 때까지 그들 국토에 남아 있었다. 그 이후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범죄에 대한 희생물을 제공할 장소를 얻지 못하였다. 이 엄청난 상실후에, 그들은 살아있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공동사회를 건설하고 성전을 지어 세계 도처로 분산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러번 핍박을 받아 왔으며, 그 중 가장 심했던 예는 6백만의 유대인이 살해됐던 나치스의 대학살이었다. 1948년에 유대인들은 다시 이스라엘을 창건했다. 이 새 국가에는 세계 100여개 국가로부터 온 이민들로 가득차 있었다. 1967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는데, 이는 기원전 586년 이후 최초로 그들이 자유로운 국민으로서 갖게된 일이다.
* 유대인의 풍습과 율법
유대교는 오늘날 세 종류로 존재하고 있다. 정통 유대교, 보수 유대교, 그리고 개혁 유대교이다. 정통 유대교인은 율법에 적힌 글대로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토라 또는 모세에 의해 쓰여진 율법을 주의깊게 연구하고 있다. 이 토라는 실제로 성서의 처음 다섯권의 책을 말하며, 정통 유대교인들에게 이것은 생활의 규율이 되는 것이다. 정통 유대교인들은 토라만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추가되어온 다른 가르침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중 어떤 가르침은 기원후 200년쯤에 "Mishnah" 란 책에 썼는데, 그것은 약 1,000 페이지 정도의 책이었으며, "Halakha" 혹은 "행할 길(the way to walk)" 이라고 알려져 있는 일상생활에 관한 교훈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후 500년 경에 유대교의 법전인 "탈무드"가 편찬되었는데, 약 36권으로 되어 있는 책이다. 그것은 Mishnah를 기초로 하여 편찬되었지만 특히 "Haggadah" 라고 하는 유명한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Torah, Mishnah, Talmud의 세 책이야말로 정통 유대교인들의 생활의 지침이 되는 책이다. 그 예로써 식사법을 보자. Torah 혹은 모세의 율법은 돼지고기나 생선을 먹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고기를 담은 접시에는 낙농식품을 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식용가축들은 특수한 방법으로 도살해서 고기속에 피가 거의 없도록 해야했다. 정통 유대교인은 안식일에는 일이나 여행도 안하며, 전화를 걸지도 않으며, 글도 쓰지 않고, 돈을 만지거나,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제한하는 것이 있다.
보수 유대교인은 Torah 에 대하여 좀 관대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율법을 그들은 대단히 중대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보수 유대교인은 히브리언어와 유대교의 전통을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편 개혁 유대교인은 정통 유대교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 자체가 의식보다 중요하다는 원리를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개혁 유대교인들은 식사법이나, 또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과 같은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 보수, 개혁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든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성일은 꼭지켜야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일치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즉,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 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라는 속담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일몰로 시작해서 토요일 일몰까지 계속된다. 신앙이 아주 깊은 유대인 가정에서는 가족이 같이 있는 곳에서 부인이 전통적인 촛불에 불을 켜고 다음과 같은 축도를 드린다. "우리 주 되시며 이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우리를 깨끗이 해주시고 안식일에 촛불을 켤 수 있도록 명을 주신 당신께 축복을 드립니다." 그 다음 아버지가 축배를 들면, 전 가족이 조금씩 그 술을 맛보며, 그 후에 안식일의 빵을 자르게 된다. 안식일의 정찬이 끝나게 되면, 보수 유대교인과 개혁 유대교인은 성전으로 간다. 정통 유대교인의 주요 예배는 토요일 아침에 있으며, 그들과 보수 유대교인들의 대다수는 토요일 오후에도 다른 예배에 참석한다. 유대교의 가장 성스러운 날은 Rosh Hashana 라고 하는 유대 신정이며 9월이나 10월에 축하토록 하는 날과 Yom Kippur 라는 속죄일이다. 이 두 날은 회개와 영혼 탐구를 하기 위해 10일 간격으로 돌아온다. 다른 중요한 때는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절을 맞게되는 때와 비슷한 때에 맞게 된다. 유월절에 유대교인 가정의 유월절은 가장 어린 아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는 데 그 질문은, "왜 이 밤은 다른 밤하고 달라요?" 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굽의 바로왕에게 노예로 되어 있을 때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힘센 팔로 그곳에서부터 인도하여 주신거다"라고 가족중의 연장자가 대답해 준다. 그리하여 기도와 특별한 음식과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게임을 비롯한 옛 의식과 축하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 유대교인들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맨 먼저, 우리는 구약성서와 그것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바로 그 분은 성스럽고, 의롭고, 순결하며,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양쪽 신앙은 기꺼이 선언하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하는 것이다.
성서의 도의적 윤리적 교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인의 전통의 일부이다. 양쪽 다 율법을,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직도 창조의 주되시는 단 한분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간에는 유사점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숭배할 필요성과 가족의 중요성,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등등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며 그의 교훈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정도로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 관(觀) : 커다란 차이점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시키는 큰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질문에 있다. 예수가 지상에 계셨을 때부터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분리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유대교인들은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 또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한다. 메시야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이 예언하기를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속량하실 분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때까지 전통이나 사소하고 율법적인 성서의 해석이 원죄와 인간의 개인적인 구원의 필요성에 있어서 시시하게 이야기되어 왔다. 그 결과로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증오하고 있던 로마인들을 축출할 수 있고 이스라엘 국가의 옛 영광을 재건할 수 있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을 찾고 있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깨닫게 될 때, 왜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의 겸손한 예수님에 의해 실망 당하게 되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떻게 그녀의 영적인 갈증을 만족하게 채울 수 있는가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죄가 많은 그 여인 역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가 바로 약속받은 그 메시야라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여4:7-26)
예수님이 메시야이며 그리스도이신 것을 신약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다(마16:16,26:63-65, 눅24:26, 요8:28).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기독교인의 믿음은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예수께서 이행하셨음으로 그 확고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예언을 완전히 수행하셨다 하는 것은 그의 주장이 진실됨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다음의 몇가지 실례를 보자. 헤롯왕이 메시야를 발견한 후 죽이고자 했을 때 그는 유대 성직자들과 학자들에게 메시야가 출생할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미가의 예언(마5:1-3)을 기억하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7장 14절과 9장 6절에 쓰기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마태는 마태1:23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안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화평의 왕자이시다. 이러한 모든 명칭은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우리에게 오신바 되었다! 그 예수는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스가랴는 왕은 전쟁을 좋아하는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슥9:9). 우리가 오늘날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날에 예수는 바로 그와같은 방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오셨다. 왜 오셨는가?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마21:4)
* 이사야 53장의 고난당하는 종
그러나 이러한 예언적인 구절중의 가장 중대한 것은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다. 49장에서 시작하여, 이사야는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속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메시야왕 즉, 하나님의 "종"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그 종은 멸시를 받을 것이며, 거절당할 것이며, 고난을 많이 겪을 것이며, 비통한 일로 가득차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3). 얼마나 이것은 세상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완전하게 묘사한 것인가! 그러나 그는 특히 자기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했던 것이다(요1:1-12). 이사야는 또한 메시야의 대속적인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인류의 죄로 인하여 메시야가 형벌을 대신 받는 것에 관하여도 설명하고 있다(사53:4-6). 베드로도 벧전2:24-25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그의 고난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메시야가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가도 설명해 주고 있다. 복음서를 보면, 이러한 여러 가지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사53:7-9, 눅23:32-33, 마27:57-60).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도 구약성서에 또한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는 이 예언을 그의 최초의 설교에서 인용했다(행2L27-31).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었다. 그들은 구약 성서에서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 "또 이르시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대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4-47)
그러면 기독교인과 유대교인과의 차이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예수에 대한 질문이다. 예수 스스로가 주장하신 대로 그는 메시야였을까, 아니면 거짓말쟁이였을까? 이 문제를 논쟁으로 해결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간에) 예수를 주의깊게 보아 그 질문에 답변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구약성서에서 예언한 것처럼 메시야로서, 구세주로서, 그리고 주님으로서 받아들여야 되겠는가? 그를 믿기로 하는 사람은 누구를 불문하고 그는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계신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로마서10:12)
** 차이점은 무엇인가?
* 하나님에 대하여
◎ 기독교인 : 한 하나님이 성서에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삼위일체로 나타내지고 있다. 신의 한 본질안에 동일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세 인격이 함께 있다.
◎ 유대교인 :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주님 하나님,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쉐마
* 죄론
◎ 기독교인 :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며, 죄가운데서 태어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즉, 교만,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형태로 된 하나님께 대한 독자적인 반항같은 것으로 인하여 심판받는다.
◎ 유대교인 : 인간은 원죄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선하게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태어났다. 각 사람은 자신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 구원관
◎ 기독교인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유대교인 : 유대인이든 아니든 어느 사람이든지 구원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을 믿고 또 도덕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얻게 된다. 유대교는 내세를 믿는 듯 하나 그러나 현세에서의 윤리적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는 것만큼 내세를 위한 준비에 관하여는 강조하지 않는다.
* 예수 그리스도
◎ 기독교인 : 그리스도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한 대로 메시야이며 그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그는 전혀 죄가 없으셨으며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다.
◎ 유대교인 : 예수를 훌륭한 윤리 선생으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도 있으나 그들은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예수는 이 세상에 지속되는 화평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는 사람 개개인을 구원하는 분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에서 구해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다.
텔레비전 퀴즈 쇼를 위한 좋은 질문이 여기에 있다. "주요한 세계의 종교 중에서 가장 역사가 짧지만, 다른 어느 지방에서보다 아프리카에서 개종자가 많이 생기는 종교는 어느 종교인가?"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이슬람교이다. 그것은 아시아, 구라파 및 아프리카 대륙의 32개 국가 내에 4억 5천만의 신봉자를 갖고 있다. 이슬람교는 종종 회교(Mohammedanism)라고 잘못 부르기도 하는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름이다. "이슬람(Islam)"이란 말은 순종이란 뜻이며 이 종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신인 알라(Allah)에게 대한 순종을 뜻하는 것이다. 신봉자들은 그들 자신을 므슬림(Muslims) 또는 모슬렘(Moslems)이라 부르며, 이는 "복종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2. 이슬람교 ==========
** 마호멧이 예언자가 된 경위
마호멧은 기원 후 570년에 아라비아의 메카시에서 탄생했다. 그는 존경받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25세때 Khadija 라 이름하는 한 부자 과부와 결혼했다. 여러 자녀 중 Fitima라는 한 아이만 성장했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었다. 생애의 대부분을 그는 홀로 묵상 가운데서 지냈다. 그는 여러 가지 괴로운 환상을 갖게 되었다. 한 때 그는 가브리엘 천사도 보았다고 믿었다. 그 천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창조하신 주님 이름으로 암송하라. 피로 사람을 창조하신 그 이름으로, 가장 관대하신 주님을 보고 암송하라. 글로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가르치신 그 이름으로 암송하라." 아라비아말로 "암송"이란 말을 Qur'an 또는 영어로 코란(Koran)이라고 하는데 그 것은 암송 또는 읽기 란 뜻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이슬람교인들의 경전인 코란은 마호멧에게 주어진 계시의 "암송"인 것이다. 10여년간 마호멧은 여러 가지 다른 계시들을 제시했다. 그의 부인의 도움을 받아 메카의 시가와 시장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마호멧은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알라신이 그를 예언자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 메카시에서 살거나 그 곳에 상인으로 온 아랍인들의 우상숭배와 음탕한 행위를 마호멧은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방해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숙부 Abu Talib의 도움으로 이를 이길 수 있었다.
부인 Khadija와 숙부 Abu Talib이 기원후 620년에 죽게 되자 마호멧과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죽일 음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622년 7월 16일 마호멧은 결국 북방에 위치하고 있는 친근하게 느껴진 Yathrib시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 도망을 Hegira라고 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작인 것이다. 이슬람교의 달력은 그 날부터 시작되며 햇수는 "A.H."로 계산되어지는데 이는 "Hegira의 해"라는 뜻이다. Yathrib시는 그 후에 Madinat an-Nabi(예언자의 도시)라고 재명명했는데, 이는 마호멧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었으나, Media라고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 도시에서 마호멧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곧 메카인들은 마호멧과 그 일행을 죽이고자 군을 조직했다. 630년에 이슬람교인들의 대승으로 전쟁이 끝나자 마호멧은 메카에 입성했다. 그는 Kaaba에 있는 흑석(Black Stone)과 운석(Meteorite)을 제외한 주요 성전의 모든 우상을 파괴했다. 마호멧은 Kaaba에 사원을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사원으로 선언했다. 이때부터 이 곳이 이슬람교인들의 기도의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그 후 2년간 마호멧은 아라비아의 예언자이며 지도자로서의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는 세계를 알라신을 위한 세계로 정복하기 위해 여러 민족들을 통합시켜 군을 조직했다. 632년에 그가 죽은 후도 그를 신봉했던 사람들의 열은 좀처럼 식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구라파까지 그들의 신앙을 전파하게 되었으며 이슬람교의 활발한 전파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코란의 가르침
코란은 이슬람교의 경전이다. 이것은 114surahs 또는 장으로 되어있는데 짧은 장은 뒷 부분에, 그리고 긴 장은 앞부분에 놓여져 있다. 내용을 보면, 모두가 마호멧에 관한 말이다. 그가 한 말을 양피지 혹은 마른 약대뼈 등에 적어 놓았던 것을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모두 기록한 책이다. 그 내용은 혼잡한 감이 있으나 그들은 그 책이 하늘에 있는 원본으로부터 사본해 온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교가 세계 각처로 전파됨에 따라 여러 가지 교훈이 생기게 되어 마침내 Hadith(전통)에다 기록했다. Hadith란 말은 sunna 혹은 습관이라고 불리웠다. 이것은 마호멧이 주어진 환경하에서 생각하며 행동하리라고 하는 것을 기술한 것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다.
* 이슬람교의 다섯 가지 교리
모로크에서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교인이면 누구나 믿어야 될 근본적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하나님 : 참된 하나님은 하나 뿐인데 그는 곧 알라신이다.
2. 천사들 : 천사들 중 주가 되는 천사는 마호멧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가브리엘 천사이다. 또 Shaitan이라고 불리우는(히브리 말로는 Satan) 타락한 천사와 Shaitan을 따르는 djinn(마귀)이라고 불리우는 천사도 있다.
3. 경전 : 이슬람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고 하는 네 개의 책을 믿고 있다. 즉, 모세의 Torah(기독교인들은 모세 오경이라고 부르는), Zabur(다윗의 시편), 예수의 Injin(복음), 그리고 코란(Koran)이란 책이다. 그러나 코란은 알라신이 인류에게 한 마지막 말이므로 이 책은 이전에 쓴 모든 책들을 능가하는 책이다.
4. 마호멧 : 알라의 예언자 28명이 코란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요나, 및 예수가 그 28명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슬람교 신자들에게는 마호멧이 가장 위대한 예언자임을 말할 것도 없다.
5. 마지막 날" : 죽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라가 심판자가 되어 사람들을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도록 만든다. 천국이란 쾌락의 장소이며, 지옥은 알라신과 그 예언자 마호멧을 거역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다.
* 이슬람교의 다섯 가지 표준
다섯가지 교리 외에 실행되야 할 다섯 가지 의무가 또 있다.
1. 신앙 진술 : 이스람교인이 되기 위해선 Shahadah 즉 "알라외엔 다른 신이 없으며 알라신의 예언자는 마호멧이다"라고 하는 신앙 진술을 신자들 앞에서 게속 반복해야 한다.
2. 기도 : 매일 다섯 번 이 의식을 지켜야 한다. 성지 메카를 향하여 무릎꿇고 머리숙이고 해야 한다.
3. 자선행위 : 신자의 총 수입중 1/40을 자선행위에 바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과부, 고아, 환자 및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4. 라마단(Ramadan) : 이슬람교인들의 음력 9월을 라마단이라고 한다. 가장 성스러운 계절이 바로 이 때이다. 한 달 동안 계속하여 금식하게 되며, 일몰 하자마자 큰 잔치가 벌어진다. 라마단 기간에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의 금식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 믿고 있다.
5.메카로의 순례 : 신자의 생애에 최소한 한번은 메카를 순례해야 하며 이것을 하지(Hajj)라고 한다. 만일 순례하기 곤란하거나 위험한 경우에는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야만 한다. 또한 비공식적인 여섯 번째의 표주로서 Jihad 또는 성스로운 전쟁(Holy War)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이는 이슬람교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을 의미하나 때로는 알라신을 위해 다른 영토를 점령하는 데에 이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근래에 와서는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무력을 집중시키는 데에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 코란을 성경에 비추어 볼 때의 모순점
성경이 이슬람 교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바 있다. 그 예로서 아랍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 육체의 부활, 천국과 지옥 등이 모두 성서의 교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상반되는 차이점이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그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코란은 누가복음 1장 26-38절(Surah 3:45-47)과 비슷한 구절에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있다. 코란은 예수를 아브라함, 요나, 그리고 다른 선지자와 동등한 선지자로 보고 있다. 한편 예수를 마호멧보다 훨씬 하위에 놓여 있으며 슈라서 4:171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예수는 알라신의 사자에 불과하며……"
마호멧은 예수 스스로 주장한 여러 가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다"(요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
성경 마태복음 17장 5절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의 아들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하게 되자 떨었다(마8:29). 의심하던 도마도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요20:28)라고 했던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주(요1:1-5)임을 확증했다. 바울도 역시 골로새서1:15-17에서 똑같이 말했고, 또한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라고도 말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마호멧은 다만 그 사실을 무시했거나 부인했던 것이다.
2. 코란에 보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쓰여져 있다.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지도 십자가에 못박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에게 그처럼 보였을 뿐이다……"(surah 4:157).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이슬람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기 직전에 알라신이 그를 천국으로 데리고 갔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십자가상에서 죽었단 말인가? 유다가 예수를 솜씨좋게 닮았다고 그들은 그럴듯하게 꾸몄기 때문에 마리아와 제자들까지도 바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주장은 모두가 성경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막14:10,11,43-45). 후에 그는 그가 행한 배반행위를 후회하여 목을 매어 자살했던 것이다(마27:5). 유다는 갈보리 산의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그는 밧줄 끝에서 죽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처형에 대한 것이 구약성서에 예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십자가에서의 처형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복음서 네 권에 각각 실려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룬 대속적인 죽음 그 자체야말로 신약전서의 근본 핵심이 되는 것이다(고전1:23, 2:2, 15:3-4, 갈2:20,6:12-14, 엡2:16 참조).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여러번 예언한 바 있었다(마16:21). 왜 그는 죽었는가? "많은 사람의 대속물"(막10:45)로 죽으셨던 것이다. 그의 흘린 피를 인하여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26:28). 바울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전에서 제공하던 동물의 희생물(히9장)을 끝맺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히9:28).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요1:29).
3. surah 4:111에 기록되기를 사람은 제각기 자기 죄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되어 있다. 이슬람교인은 다섯 가지 믿음의 표주를 지킴으로써 죄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개인의 과실이며 책임이라고 보는 것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surah 10:109)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성경의 교훈을 생각해 보자. 이사야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이사야53:6). 용서를 얻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만이라고 신약전서는 가르치고 있다. 마호멧은 그의 추종자들이 우상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후에 그 스스로를 예언자라고 말하고 규범과 규칙을 지키는 종교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는 무거운 책임의 짐을 사람에게 부담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무거운 것을 사람들로부터 없애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고 하셨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마호멧은 단 하나의 죽은 예언자요,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구세주시라는 차이다.
** 이슬람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 하나님 >
* 기독교인: 한 하나님이 성경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한 "본질"안에 영원히 동일하신 세 인격이 삼위일체로 게신 것이다(마3:13-17, 28:19, 고전13:14)
** 이슬람교인: 알라신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란 없다.
< 예수 그리스도 >
* 기독교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돌아가셨고 죽은 자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인을 속죄하시는 전혀 죄가 없는 분이시다(요1:13-14, 히4:15, 벧전3:18, 고전15:3).
** 이슬람교인: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에 불과하며 마호멧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위해 죽지 않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유다이다.
< 죄 >
* 기독교인: 죄란 능동적 혹은 수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교만하고 독자적인 행위(롬1:18-23, 3:10,23)
** 이슬람교인: 죄란 알라신의 뜻에 등한히 하는 일 또는 다섯가지 표주에 기록된 대로 종교적 임무를 등한히 하는 것이다.
< 구원 >
* 기독교인: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 이슬람교인: 사람은 자기 스스로 구원을 얻고 자기 자신의 죄의 값을 치룬다.
3. 힌두교 ========
서양 사람들이 생각할 때 힌두교가 보고 있는 생명의 길은 이상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서양세계(유럽, 남북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시아의 사람들과 전혀 상이한 전통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서양식 사고방식은 옛날의 희랍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 우주는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온 것이다. 이러한 고대 희랍 사람들의 생각 위에, 유태교와 기독교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고, 완전한 계획과 목적이 설명되어 있는, 성서의 가르침을 추가했던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이러한 설명을 믿었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 사람들이 자연에서 이런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과학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들은 법칙을 만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미세한 물체, 초목, 혹은 별을 볼 때 그들이 존재하는 계획과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사물이 각각 아주 적절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서양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기억하기 바란다.
* 동양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이 다른다
동양에서는 발전과정이 아주 다른다. 전형적인 동양인(중국사람, 인도사람, 동남아시아사람들)은 우주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다.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우주에 있는 만물이 임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그들이 믿는 종교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영역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양인은 이 영역에 도달하기를 원하며 세상을 완전히 무시함으로 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참된 과학이 나오기란 얼마나 어려운 문제이겠는가? 일본 또는 중국이 오늘날 과학적으로 발전되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것은 그들이 서양식 사고방식을 택한 범위내에서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생활에 관한 견해가 전혀 상반되므로 상호 이해하기 곤난한 점도 많이 있는 것이다. 상호 자기 견해를 설명함이 거의 불가능한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의 종교에 관하여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힌두교로부터 시작해보자. 여러 분파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힌두교의 주요파에 대한 것만을 생각해 보자.
힌두교의 성장과정을 최초에 인더스강 유역에서 시작된 때부터, 허리우드의 지성인으로부터 히피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Vedanta라고 하는 현대판 힌두교의 형태로 명망이 있게된 데에 이르기까지의 자취를 더듬어 보자.
* 힌두교의 기원과 배경
기원전 2,000년 경 당시 발전했던 아리안 족들이 인더스강 유역의 사람들을 정복했을 때 힌두교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리안족들은 그들의 종교를 갖고 들어왔다. 그것은 지금 Vedic 문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찬송과 기도, 성가 등으로 구성된 종교였다. "베다(Veda)를 그들은 "계시받은 지혜"라고 믿고 기독교인이 성경을 대하듯 힌두교인들은 "베다"가 성스럽게 생각되었다. 베다에는 여러 신들로 가득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마치 희랍과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러 남자 신과 여자 신을 상상케 하는 것이다. 다른 여러 고대 사람들과 똑같이 아리안족들도 이 여러 신들이 죽음과 재난을 초래하게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이 여러 신들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된다는 것이었다. 힌두교중에서 브라만이라고 하는 일당이 생겼는데 이들은 점차 강화되어 마침내 상류 사회를 차지했다. 이들은 "베다"에 기록을 가하여 그 경전을 브라마나(Bramana)라고 불렀다. 여기에 그들은 산 제물을 제공하는 의식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기원전 500년 경에 또 다시 '베다'에 다른 기록을 추가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목적은 엄격히 구별된 사회계급 제도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 찬송가에서 볼 수 있듯이 브라마 신의 머리, 팔, 다리, 그리고 발로부터 유래된 네 가지 사회계급제도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네가지 계급이란 브라만(Brahman: 승려),크샤트리야(Kshatriya: 무사), 바이샤(Vaishya: 농부) 및 슈드라(Shudra: 노예)이다. 처음의 세 가지 계급은 힌두교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이요할 수 있으나 마지막 계급인 노예는 "베다"를 읽을 수도 없고 구원을 얻을 권한도 부여되어 있는 않고 있다.
* 힌두교인 생활의 4단계와 네 가지 목표
세 가지 상류급에 속하는 힌두교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상세한 방법에 대하여 "베다"는 잘 설명하고 있다. 힌두교인 소년들에게 그 우선권이 주어져 있다. (여자들에 관하여는 설명조차 되어 있지 않고 있다!) 그러면 소년들은 중생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후에 그들은 4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1)학생, (2)처자를 둔 가장, (3)속세를 떠나 계시를 추구하는 묵상인, (4) 속세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정없이 방랑하는 자의 네가지 단계이다. 그들에게는 일생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목표가 부여되는 길이다: 의롭고 덕행이 있으며, 물질적 재물을 소유하며, 사람과 기쁨 그리고 미의 감상을 통한 생을 즐기며, 생활을 초월한 영적 승리를 얻는 것 등이다.
기원전 800-300년간에 기록한 "우파니샤드" 에도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방법을 추가해 놓았다. 힌두교에서는 이것도 성서로 간주되어 있으나 서양인들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견해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 세상 밖에 brahmanatman(하나님과 같은 어떤 존재)란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며 또 의미를 갖고 있는 단 하나의 신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마야(maya)라고 하는데 마야는 임시적인 존재며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하며 숨쉬고 있는 모든 생물은 아아트만(자아,atman) 또는 혼(soul)이 있는데 그것은 paramantman, 혹은 세상 혼의 한 부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각 개인의 혼은 마야에 존재하는 동안 paramatman에 돌아가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가 있다고 한다.
환생은 결국 열반에 이른다. (Reincarnation)은 결국 열반(Nirvans)에 이른다.
자아(atman)가 그 본 위치로 돌아가는 단 한 가지 방법은 punar-janman, 또는 환생뿐이라고 우파니샤드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혼이 벌레로 시작하여 죽으면 고등생물에 차차 재생되어 마침내는 인체에 이른다고 하고 있다. 자아가 인체에 이르게 되면 높은 사회지위를 얻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높은 사회지위는 덕행을 행하며 달마를 지킴으로써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도덕, 사회, 종교적인 의무가 포함되는데 이것은 힌두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혼을 놓아주는 다른 한 가지 법은 요가에 의한 법으로 이것은 사람들의 육체적 욕망을 저지시킴으로 죽음과 재생의 순환을 피하여 (세상 혼)parmatman과 합치게 되는 것이다. 한번 자아를 스스로 잃고 (세상 혼)에서 본질을 잃게 되면 열반을 통과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 때에먈로 비로소 힌두교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무한 세계로 내딛게 되는 것이다.
* 힌두교인은 세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힌두교인은 세상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닌 까닭에서이며, 진실된 것은 다만 자기를 자제함과 묵상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신자는 그의 혼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살아나는 그런 순환과정을 열반(무한 세계)에서 자유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믿는다. 힌두교인들은 「우파니샤드」가 그의 혼이 움직이고 있는 곳을 향하여 영원한 세상 혼(paramatman)을 위해 세상을 거부하는 지혜를 얻게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야말로 힌두교 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부여하고 있고 특히 Vedanta 철학을 가지고 이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의 교훈은 오랜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힌두교 신자들간에 그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네 계급 중 가장 높은 승려 계급인 브라만 계급에 이른 후에만 혼은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는 점과 같은 것 때문이다. 이것은 인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빈곤한 자들과 「우파니샤드」를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에게는 죽음과 재생의 끊임없는 윤회(samsara)과정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견해는 기원전 500년경에 구원의 중도(middle way)를 설교하기 시작했던 석가(Gautama Buddha)에 의해 도전받게 되었다. 인도에서 불교는 기원후 1000년경 새로운 형태의 힌두교가 일어났을 때 사라졌다.
이 "인기있는 힌두교"는 곧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긴 서사시인 Ramayana 와 Mahbharata 와 같은 새로운 문학이 나타났다. 또 크리슈나신을 숭배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방법을 기록한 Bhagavad-Gita, 또는 "신들의 노래"라는 것도 나타났다. 또한 신에 관한 애정적인 이야기를 싣고있는 Puranas 도 출현하여 힌두교인들간에 매우 인기가 높았었다.
새로운 힌두교는 3억 3천만의 신이 있다고 수긍하고 있다. 즉, 이것은 매 힌두교인마다 한 신이 있다는 것과 같은 수이다. 약 2억 정도의 신자는 비쉬누(Vishnu)신을 숭배하는데 비쉬누신은 최소 10회나 인간들에게 출현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비쉬누신은 거대한 거북이로서도 나타났고, 부처로서도 나타났고, 서사시의 중요한 영웅인 라마와 크리슈나로서도 나타났다고 믿고 있다. 또 기타 수백만 신자들은 비옥의 신, 시바(Shiva)를 숭배했는데 그들의 의식제도는 가나안인들의 그것만큼 악의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가나안인의 우상을 파괴하도록 명했었던 것이다.
"국민의 힌두교"는 다음 세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한 가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달마(dharma) 즉 의무를 다함으로, 「우파니샤드」의 지식을 지키는 법으로, 그리고 비쉬누나 시바 같은 신을 숭배함으로써 되는 일이다. 그 마지막 방법이 인도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류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적응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혼이 높은 계급에 이르기 쉬운 방법이며 최종적으로 열반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 서양인들에게는… 희망없는 뒤범벅에 불과하다
서양인들이 볼 때 힌두교는 아무 희망도 없는 잡탕에 불과한 것이다. 힌두교는 수정, 추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힌두교를 이론적으로 배열 또는 설명하기는 마치 눈감고 장갑끼고 컴퓨터의 기계를 수리하고자 하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힌두교의 복잡성을 무시하는데 이는 그들 역사의 시초부터 그렇게 성장해 왔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 문명에 힌두교는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므로 의문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가 인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별로 미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중에는 그리스도를 받아 들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복음을 거절했고, 이는 그들의 생각에 복음은 너무 성질이 다른 서양 문명인 것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힌두교중 어떤 형태에 있어서는 약간의 기독교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Vedanta 는 그 좋은 예이다. Vedanta 에 의하면 창조의 신인 브라만은 스스로 인간의 형태로 여러 번 오셨다고 되어 있다. 그는 여러번 그와 같이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석가, 크리슈나(Krishna),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브라만의 육체화라고 믿고 있는데 이것을 그들은 초인적인 구세주들(super-saviors)이라고 부르고 있다. Vedanta의 추종자들은 브라만의 최근의 육체화는 Sri Ramakrishna라고 믿고 있는데 그는 19세기 말까지 벤갈에서 살았었다.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말하기를 그는 힌두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영적인 단련을 실천하였으므로 각각 하나님의 환상을 얻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진리는 하나인데, 성인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른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신앙의 종류가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실제인 하나님으로 이르는 여러 가지 다른 길에 불과하다"라고 Ramakrishna는 가끔 말했던 것이다. Vedanta는 모든 종교와 친근하다. "용감한 새 세계"(Brave New World)의 저자 Aldous Huxley는 Vedanta의 열열한 신봉자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힌두교인으로, 불교신자로, 또 이슬람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확실히 가망성 있는 일이며 그리고 동시에 영구한 철학(the Perennial Philosophy)의 근본 교리에 완전히 일치할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Vedanta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Swami Prabhavwnnanda는 힌두교인은 "그리스도를 신의 육체화로 받아 들이기 쉬우며, 크리슈나 혹은 그가 선택하는 다른 선생들을 숭배하는 것과 꼭 같이 그리스도를 숭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단 하나의 아들로서는 받아 들일 수 없다…"고 했다.
* 간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온 관점
한 비슷한 서술이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인 간디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행하여졌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하며 그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기 힘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아들들을 가질 수 있었다면, 우리 모두도 그의 아들이 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과 같았다면…… 그 때엔 모든 인간들도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며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간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에 있어서 어떠한 "신비스럽거나 기적적인 점"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다른 힌두교인들과 같이 간디는 기독교에서의 죄 문제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로부터의 참된 구원의 필요성을 깊이 느꼈던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은 내 생명을 주관하시며 그의 자손인 내가 그에게서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고 있다. 나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이 내 안의 악한 여러 가지 감정 때문이며,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라고 간디는 말했던 것이다. 만일 간디가 사도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훌륭한 일이었을까! 즉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중대한 논제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힌두교와 그리스도교와의 구분을 명백히 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힌두교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여러번 재생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 육신으로 오셨으며 그는 인간들에게 선생으로 가르치고자 온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오셨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히9:28). 또 그가 다시 재림하실 때엔 죽은 자를 심판하는 강력한 심판자로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다(계20:11-15). 힌두교의 여러 구세주와 달리 그리스도는 스스로 주장하신 대로 증거를 보이셨던 것이다. 요한복음 제 5장에서 그는 세례 요한의 증거(33절)를, 그 자신의 역사하심을(36절), 하나님 아버지를 (37), 그리고 성경(39절)등을 인용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힌두교인들에게는 이해 못하는 난점이 되고 있다. 부활하신 사실이 힌두교의 계속적인 재생설을 논박하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가 한 최상의 구세주에 불과하다는 그들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신론자나, 일원론자나 다신론자, 불가지론자, 혹은 유신론자의 그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Vedanta의 신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어떤 특수한 도덕을 지키도록 주장하지도 아니하며……각자 자기의 특수성에 비추어 받아 들일 수 있으며 다만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할 권한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대조되는 성경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지상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왜 하나님은 인간들의 역사 속에 들어오셨는가? 그는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죽기 위해 오셨다. 그는 또 다시 부활하셨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많은 위대한 선생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며, 그들은 구원받아야 될 죄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힌두교의 신이 너무도 미소한 이유
사실상 힌두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에 불과하다. 힌두교인들은 개인에게 아무 관계가 없는 브라만신을 사실 이상으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 브라만신을 힌두교인들은 어디서 찾고 있겠는가? 자기 안에서 찾고 있다. 힌두교인에게는 사람이 바로 신이다. 힌두교의 신은 너무도 미소하다. 요한일서 5:11-12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이 영생은 그 아들 안에 있으며, 만일 우리가 그 아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영생을 소유한 것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들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간디가 가지고 있는 종류의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멀리 떨어져 있어…게속되는 고통을…"하는 그런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8-10)
** 흰도교와 기독교 무엇이 다른가?
< 하나님 >
기독교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영원하신 영적 존재(마3:13-17,28:19,고후13:14)
힌두교인: 브라만신은 무형이며 추상적 영원한 존재이나 아무 특성도 없다. 수백만의 사소한 신들을 가지고 있으며 삼위일체 형태를 취한다.
< 예수 그리스도 >
기독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다. 그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며, 죄없이 오셨고, 우리 인간의 속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요1:13-14,10:30, 8:46, 히4:15, 막10:45, 벧전2:24)
힌두교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많은 아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신성함이 없고,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것도 아니다.
< 죄 >
기독교인: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교만하고 독자적인 반항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안에 기록해 놓은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 죄는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하며 그 결과는 죽음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를 말한다(롬3;23,6:23)
힌두교인: 선과 악은 상대적인 어휘이며 무엇이든지 돕는 것은 선이며, 무엇이든 방해하는 것은 악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알기 위해 이 장애물을 거치지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이 현생에서 성공치 못하면 환생시 또 다시 노력할 수도 있다.
< 구원 >
기독교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하여 인간은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롬3:24, 고전15:3)
힌두교인: 인간은 헌신, 묵상, 선행 및 자기 자제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
4. 불교 =======
힌두교와 달리 불교는 한 개인이 창시했고 창시 일자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교 창시자는 고타마(Siddhartha Gautama)란 사람인데 기원전 560년 경 인도 국경 「네팔」의 Lum-bini에서 힌두교인으로 출생했다. Gautama가 출생했을 때 예언자가 예언하기를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다. 만일 Gautama가 네 가지 일 즉, 질병, 노년, 죽음 그리고 세상일을 단념한 승려를 보게만 된다면 그는 이 세상의 주권을 버리고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Gautama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지상에서 위대한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으므로 그에게 궁전을 건립해 주었다. 그 아버지는 병자, 노인, 시체, 그리고 승려의 어느 것도 궁전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Gautama는 세상 일을 잘 보지 못하며 이렇게 성장하게 되었고 후에 Yasodhara라고 부르는 미인과 결혼하여 득남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들은 Gautama에게 다른 여러 가지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궁전을 둘러싼 공원속을 수레를 타고 돌고 있었는데 그는 무시무시한 상처를 가진 한 사람과 노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모습과, 묘지를 향해 가고 있는 한 시체와,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한 승려가 구걸하고 다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날 밤부터 Gautama는 그 승려의 행복해 보였던 얼굴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자기가 살고 있는 궁전의 화려한 사치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가 하고 묵상하게 된 것이다. 그 날 밤 늦게 잠들고 있던 자기 처자를 마지막으로 쳐다보고 그 궁전을 영구히 떠났던 것이다. 29세 된 Gautama는 생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노란색의 옷을 입고, 거지 승려 행세로 시골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최초에 그는 몇몇 훌륭한 선생들로부터 upanishad를 연구했으나 그 책에서 그는 만족을 얻지 못했다. 다음에 그는 자기를 부인해서 구원을 얻고자 시도했다. 그는 거의 뼈만 남을 정도까지 금식도 해보았으나 역시 행복을 얻지 못했다.
* Gautama는 "깨달은 사람(覺人)이" 되다
그는 한 나무 밑에서 40주야를 앉아 있었다. 그가 구하고자 원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Mara라고 하는 악마가 이런 뜻을 단념하도록 유혹했던 것이다. 40일 후에 그는 결국 열반(涅槃)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고 자신의 구원을 발견했다고 느꼈다. 이때부터 그를 "부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경험이 있은 후 부처(Buddha)는 인간 세계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설교를 시작했으며, 생의 뜻과 구원에 관하여 가르치게 되었다. 그 후 얼마후에 그는 승려들의 규범인 Sangha를 만들어 내었다. 45년 후 부처가 사망할 때까지 수천명이 그 종교를 받아들였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의 발생과정이 힌두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른 점이 많이 있다. Vedas와 Upanishads가 신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부처는 주장했다. 그것은 구원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또 인간이 Paramatman(세상 혼)의 일부인 atman(혼)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했으며, 또한 현세는 maya(비실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다만 생의 단계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의무인 Karma와 함께 힌두교의 환생의 가르침을 받아 들였던 것이다.
* 중도와 네 가지 고상한 진리들(사체: 四諦)
부처의 이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중도"이다. "중도"란 힌두교의 복잡한 종교와 부처가 알게 된 세상의 육욕에 빠지기 쉬운 것 사이를 해결짓는 구원에 이르는 영적 길을 말한다. 부처는 힌두교의 사회 계급 제도를 강력히 반대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열반에 이르기 전에 여러번 환생해서 Brahman 계급에 도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사회 계급에 관계없이 열반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불교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게 했으며 특히 빈곤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했다.
힌두교의 막연하며 어려운 교리대신 불교는 명백하며 건실한 교리를 신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부처가 인도의 베나레스(Benares)에서 설교했을 때 그는 불교의 네가지 주요 원칙을 제시했다. 이 네가지 원칙을 "사체"(Four Noble Truths)라고 한다. 이제 이 사체에 관하여 알아보자.
1. 고체(苦諦):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부처가 이것을 의미하기를 산다는 바로 그 행위는 고통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탄생하게 되면 누구나 다 고통을 면할 수가 없다. 구원(열반)이란 이렇게 계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면함을 받게 됨을 말한다.
2. 집체(集諦): 「고통의 원인은 자아 욕망에 있다.」 인간이 부단히 계속되는 고통속에 있게 됨은 세상 일에 너무 집착되어 있는 까닭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tanha(번뇌)라고 부른다.
3. 멸체(滅諦):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다.」산다는 것은 고통이며 고통은 번뇌에서 기인되므로 번뇌만 제거하게 되면 고통은 자연이 없게 된다. 사람이 자아욕망을 그친다면 고통도 없어진다는 것이 부처의 위대한 발견인 것이다.
4.도체(道諦): 「중도를 따름으로 욕망을 제거하는 길」
이렇게 하여 부처는 힌두교인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했던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환생될 수도 없음을 명백히 알고 그는 tanha라고 하는 이름을 만들게 된 것이다. 다음에 부처는 사람이 스스로 그 욕망을 없앨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제도를 "팔정도"(Eightfold Path)이라 부른다.
이 팔정도는 다음과 같은 옳은 생활의 방법 여덟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1)정견(正見) (2)정사(正思) (3)정어(正語) (4)정업(正業) (5)정명(正命) (6)정정진(正精進) (7)정념(正念) (8)정정(正定) 등이다.
부처는 이 팔정도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며 죽음과 환생의 부단한 순환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열반의 상태가 어떠한 것이냐는 질문에 부처는 대답하기를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다고 항상 대답했다. 그가 할 일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피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며 한 때 그가 자유롭게 된 것을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힌두교는 이 세상에서의 생은 아무 뜻이 없다고 하고 있고, 불교는 이 세상에서의 생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라고 하고 있다. 참된 고통이 있음으로 세상을 도피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동양인들에게는 불교란 항상 마음을 끌게하는 종교였다. 막연하고 모순된 생각이 가득차 있는 힌두교에 비하면 정확한 인간들의 문제점과 "구원의 계획"이 똑바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개혁된" 힌두교와 새로운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불교가 수세기 동안 인기를 끌던 종교였다. 그리스도 탄생후 약 천년간 복음이 유럽 전역에 소개되었을 때 불교의 승려들은 상업길을 이용하여 중국, 일본, 티벳 등지로 그들 종교를 전파했다. 오늘날 세일론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약 5억의 불교 신자가 있다.
* 20세기의 불교 형태
20세기의 불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티벳에서는 귀신을 숭배하는 불교가 성행하며 일본에서는 새로운 군대저, 국민적인 Soka Gokkai가 숭배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두가지 중요 형태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소수의 신자가 갈 수 있는 교리"의 불교인데 다행스러운 소수만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불교이며 부처의 도를 정확히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소승불교란 명칭은 비평가들에 의해 주어진 파생된 명칭인 까닭에 후에 Theravada 불교라고 변경되었다. Theravada(연장자의 도)는 승원의 생활을 특히 강조하는데 승원들을 위한 토지와 금전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매우 부하게 됐다. Theravada 불교는 현제 세일론,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그리고 라오스에서 성행하고 있다. "대도"(大道)의 가르침인 대승 불교는 구원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부처가 믿었던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부처는 각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소승불교는 구원의 신에 대한 관념을 진전시켰다. 그들의 이론은 부처가 45년간 지상에 생존했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열반에 이를 수 있었으나 그대신 인류를 구하기만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는 인류의 한 구세주였으며, 아직까지도 신실한 신자들로부터 구세주로 불리우고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Theravada와 대승 불교는 부처에 관한 서로의 의견이 전적으로 다름을 볼 수 있다. Theravada 교도들에게는 부처는 한 선생에 불과했고 대승 불교 신도들에게는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신이란 지위로 이끌어 올린 것이다. 이런 까닭에 대승 불교가 훨씬 더 인기가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 티벳, 일본, 월남, 한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오늘날 불교는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굉장히 성장되고 있다. 그러면 "불교가 어떻게 인류의 필요에 대한 답을 잘 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다. 불교가 전파된 곳마다 사람들의 도의심을 앙양시키고 정직성을 갖게 하며 성도덕을 함양시키고 절제성있는 사람을 만들게 됐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불교인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인을 전쟁과 원자 폭탄을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마치 기독교 때문에 나치스주의가 생겨났다고 말하는 유대인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근년에 와서 동남 아시아의 많은 불상사가 불교도로 인하여 야기되고 있음을 그들은 잊고 있는 것이다. 불교도는 고통을 제거키 위하여 자기들의 종교가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도들이 만일 사회 사업에 적극적이라면 그래도 수궁이 좀 가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거의 이 분야에 대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통에서 도피하는 것만을 그들의 임무로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간섭할 생각은 조금오 없는 것이다. 불교도는 생명에 대한 인과관계를 주장하며 고통을 생의 일부분으로 알고 있다. 고통자체는 없어질 수 없으며, 각자 도피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는 염려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견해를 기독교와 비교해 보자. 부처가 죽은지 520년 후에 예수님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충만하고 풍부한 생을 인류가 가질 수 있도록 지상에 오셨다. 부처는 하나의 길(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데에 반하여 예수는 그 스스로가 길이라고 주장하셨다. 이 두가지 주장이 어떻게 다른가? 부처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자.
** 부처의 가르침과 성경의 비교
1. "사는 것은 고통하는 것이다"라고 부처는 말했으나 그는 고통의 이유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고통이 있는 것을 도처에 시인하고 있으며, 또한 고통에 대한 설명도 가하고 있다. 로마서 8:18-23에서 온 세계가 "탄식하며 고통하며" 모든 사람들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로마서 5장에는 아담(Adam)이 죄를 범했을 때 온 인류에게 병과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전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인간은 선택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고 성경에 말하고 있다. 성경의 견지에서 볼 때 죄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는 반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2. 고통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다는 부처의 관점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욕망을 유혹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욕망", "탐심", "열망", "식욕" 등으로 인하여 유혹을 받게 된다고 야고보서 1:13-15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이러한 유혹에 골복할 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결과는 영적 고통과 죽음이다(로마서6;23). 고통의 원인은 욕망에 있다는 원리에 기독교인들은 동의하나 욕망을 없애고자 하는 불교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3. 욕망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라고 부처는 가르치고 있다. 그를 믿는 신자들은 수세기 동안 팔정도를 지켜 왔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17:9)는 것과 인간의 최상의 의도가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발견해왔다.
사람이 자기를 이기고자 할 때 그는 보다 더 높은 힘의 근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부처는 불가지론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의 가능성이 있음을 무시하고 있다. 디도서3:3-8에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마다 한 때는 욕망에 매인 노예였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동시에 인간으로서 이 욕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고자 오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도움없이 욕망을 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안에서 욕망도 함께 죽고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요한복음 3:5, 고린도후서5:17, 갈라디아서2:20 참조)
4. 욕망을 끊어버리기 위해 팔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부처는 말했다. 즉 정견, 정사, 정어,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의 팔정도를 지켜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상한 관념은 마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산상 설교와 비슷한 것이다.
** 기독교가 불교를 초월하는 점
불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이 인간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도 비슷한 표준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힘도 또한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신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날 밤 예수는 그 제자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온전한 방법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포도나무라고 말했고 신자들을 그 가지라고 했다. 왜냐하면 포도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 방방 곡곡에 자라고 있어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식물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장미, 관목, 과일나무 등의 예를 드는 것이 더 쉬운 일이겠으나 그 비유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다음과 같이 예수는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14;4-7). 계속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9,10절)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효과적인 삶을 위한 두 가지 긴요한 성분을 주시는데 그것은 힘과 권능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생에서 주님과 같이 하며 복종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 그만큼의 힘과 권능을 증가시키며 제한하신다.
** 모든 사람들이 해야만 될 선택
그리스도께서는 복종해야 될 계명과 명령만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마치 포도나무나 관목이나 나무가 적절한 관리만 하게 되면 잘 성장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고 변화하며 발전하도록 돕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신다. 이와 반대로 불교도들은 올바로 살고자 하는 팔정도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부처가 신자들고 하여금 그 길 가운데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지는 않는다. 이 여덟가지 도는 고귀한 생각처럼 들리기는 하나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는, "내가 곧 길이요…"(요한복음14:6)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에서 살아나심으로 그의 능력과 권능이 주어질 수 있음에도 그리스도가 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이해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 안에서 참된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는 "너 스스로가 노력해야만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반면, 그리스도는 "너 자신을 나에게 맡기면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권능을 주겠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거나 아니거나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즉, 자기 노력, 아니면 구세주이시며 주님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일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써 구세주로 받아 들이고 그에게 복종치 아니한다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같으며 어느 면에서 본다면 욕망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코자 노력하는 불교도와 같다. 아마 그리스도인이 불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하더라도 그의 생활에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은 생활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 불교와 기독교는 무엇이 다른가?
< 하나님 >
불교인: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기독교인: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욥기42:2, 시편115:3,마태19:26)
< 예수 그리스도 >
불교인: 훌륭한 선생이며, 부처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기독교인: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마태14:33, 16:16, 요한1:34, 9:35-37, 고전15:3, 로마서5:6-8).
< 죄 >
불교인:인간의 진전을 방해하는 것이 죄다. 우리 각 개인이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기독교인: 하나님의 뜻에 모순되는 생각이나 행위이다. 인간은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어 있다.(롬3:10, 23, 5:12, 엡2:1)
< 구원 >
불교인: 자기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기독교인: 그리스도의 노력으로만 가능하다(행4:12, 디도서3:5, 엡2: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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