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어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어요?’라는 질문이다.
상담실에서는 그동안 세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 안에는 많은 사례들이 나와있다.
각자의 내용은 달라도 그 사례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이 질문이다.
‘왜 하나님이 내 인생에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왜 그때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시지 않으셨을까?’
‘왜 그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이제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
‘나에게 어떻게 이 모순을 이해하라고 하시는 것인가?’
이 질문은 비단 책에 나온 사례자들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고통 속에 빠진 모두의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 자신이 왜 그런 희생자가 되어야했는지에 대해 답을 얻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답은 얻어도 되고 안 얻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겉으로는 넘어갈 수 있으나 이 답이 얻어지지 않았을 때 마음의 온전한 치유란 지극히 얇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들이 그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치유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만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람이 섣불리 해준다면 이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된다.
‘하나님이 고통 당하는 너와 함께 계셨다.’ ‘그랬어?’
‘같이 슬퍼하셨다.’ ‘그랬어?’
이런 식으로 이런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답변으로 무리하게 상담을 진행시킬 때 내담자는 마음이 더욱 닫히고 치유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 태도를 갖지 아니할 수 없다.
얼마전 한 자매와 상담을 했다. 그 자매의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했지만 너무도 수동적인 자매였기에 그 분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외부적인 증상이 있다면 아무 감정도 없고 모든 일에 적극성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감정의 요동이 없다. 하지만 그 자매는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을 열심히 하는 자매였기에 모든 사람은 이 자매가 아주 신앙이 좋은 사람이겠거니 했고 그 자매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유일하게 반응하며 이 조용한 균형이 깨어질 때가 있는데 누군가 답답함을 호소하는 사람을 볼 때였다. 그때 그 자매는 자신의 마음이 뒤집어 지는 것을 느꼈다. 자매와의 상담 속에서 드러난 것은 자매 안에 포기된 채 묻혀있는 질문이었다.
자매는 과거에 성폭행을 당한 사람이었고 그 가해자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십여 년이 넘게 이 자매를 성적으로 유린하며 위협하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 지도자와의 관계가 어렵게 정리되고 난 뒤에 자매는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새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활은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듯 아무 생기가 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신앙인의 형태를 넘어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그 포기된 질문이 만들어놓은 벽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항상 같이 계셨다는 것 압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교회를 갔을 때 (그 일은 교회에서 있었다.) 왜 그때 나를 구해주실 수 없었을까요?’
이 자매는 이 질문을 수천번 수만번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물었듯이 다른 상담자에게도 물었다고 했다. 하지만 상담자가 해준 대답들은 이 자매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기만 했을 뿐이었다. 자매는 어느때보다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는 비록 몸과 마음이 고통 그 자체였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십여 년을 묶는 관계가 깨어진 지금 완전히 혼자가 된 이 자매는 너무도 절실히 하나님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부르지만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최초의 원인이 된 그 사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왜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상담자는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이 분명한 말씀을 들려주셔야만 하는 시점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들려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다려야하는 것이다. 상담자가 이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비록 그 자리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그 내담자는 치유와 상담자에 대한 회의와 실망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리하게 상담자 자신의 열심에 빠져서 경험 속에 들은 말들을 가지고 대답해 주려한다면 모처럼 마음을 드러낸 그 속 사람은 다시 천길 깊은 동굴로 숨어버린다.
나는 자매에게 답했다. “나는 자매에게 이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어. 방법은 한가지야. 이 시간에 직접 하나님에게 물어보자. 그분이 대답해 주실 거야.” 그리고 우리는 같이 기도했다. 긴장의 시간이 지난 잠시 후 그 자매는 울기 시작했다.
“주님에게 물어보았어요?” “네”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주님께서 그때 그 시간에 십자가위에 계셨다고 했어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자매의 얼굴을 보며 그 대답이 주님에게 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말을 흉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것이 내 이미지로 만들어낸 위로의 말이라면 그것은 아무 능력이 없다. 상담자의 입을 통해서일지라도 그 대답은 분명히 주님 그분으로부터 그 당사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오직 그 사람에게만 주시는 유일무이한 말씀 그 대답 그것만이 고통 속에 부르짖는 자의 의문을 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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